인간이효석
-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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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가산(可山),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28년『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노령근해』, 『상륙』, 『행진곡』,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 후 모더니즘 문학단체인《구인회》에 참여하였고『돈(豚)』,『산』,『들』등을 발표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시적인 문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작품집으로는 『노령근해』(1931년), 『성화』(1939년), 『해바라기』(1939년), 『이효석단편선』(1941년), 『황제』(1943년) 등이 있고, 장편으로는『화분』(1939년),『벽공무한』(1941년)이 있다.
- 가족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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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住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리 681번지(이효석 생가터)
가족
부 - 이시후
모 - 강홍경 사이에서
장남 - 이효석 출생(출생일 : 1907년 2월 23일)결혼 1931년 7월 결혼(25세)
처 - 이경원(함북 경성 출신으로 나진고등여학교 출신임)
장녀 - 1932년 나미출생(생존)
차녀 - 1935년 유미출생(생존)
장남 - 1937년 우현출생(도미)
차남 - 1940년 영주출생(별세)출생과 유년시절(出生, 幼年時節)
1907년 2월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인데 효석의 생가는이 마을의 중간쯤 되는 우경산밑 이다. 뒷산은 둥그스럼하게 치달린 산으로서 산세가 우악하게 생겨 주변경관을 맑게 한다.
이 산 좌편으로 폭 약80m, 길이 약 900m로 흘러내린 경사진 밭이 완만하게 놓여있다.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다. 생가 뒷편 언덕에 는 밤나무 몇그루, 돌배나무 한그루 등이 큰나무로 서 있고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각 한그루씩 서 있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다. 말하자면 이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린 집이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
1914년 8세때 외학을 하게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는데 봉평집에 다니곤 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었다.
봉평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동작품속에 나오는 개울)에 이르며 이 개울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 (한길은 봉평으로 가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효석이 걸어다녔던 길목이 된다.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다시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6년 동안 효석은 이 100리 길을 왕래하였는데 그렇다며 효석은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어서 내왕했겠는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 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웠다. 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거운 햇빛, 소나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즈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하고 낙엽도 밟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맞이하였고 산악 지대의 설경에 파묻혀 살았다. 절기마다 다른 분위기와 변화해가는 자연의 순환을 맛보게 되었다. 또 절기마다 하늘과 구름의 색깔이 다르게 변하였고, 바람결 또한 그렇게 변하며 불던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유년시절을 지내왔던 것이다. 후에 그의 작품속에 나오는 자연의 숨소리가 싱그러 운 것은 이 유년시절에 체험하고 몸에 밴 소질에서 풀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효석은 외학을 하면서도 우등생으로 평창공립보통학교 6년간 과정을 전부 마쳤던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년기로 정의한다. 다시 청운을 싣고 경성으로 1920년(14세)에 효석은 청운의 꿈을 가슴에 싣고 더 먼 외학의 길을 경성으로 오른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현민 유진오를 만나게 된다. 처음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아 곧 수송동 하숙으로 옮기고 그야말로 타관살이가 제대로 시작되었고 또 본격적인 공부생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교에서 효석과 진오는 수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때 벌써 두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고 문학쪽으로 재질을 드러내 효석은 산문을, 진오는 시를 창작하면서 서로 평을 주고 받는 수학과정을 거치며 서구문학을 섭렵하기도 하고 자작소품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직업생활과 작품활동 가난한 가운데 직업을 구하였지만 이웃의 눈총, 또 스스로도 못마땅하여 경성농업학교로 직업을 옮겨 하향하다시피한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중앙의 신문, 문예지, 월간잡지 등을 통하여 왕성한 발표를 해 나갔다. 가난한 와중에서도 이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만은 정력을 다 바쳐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정열을 보였다. 이런 시기에 1932년 현민(유진오)이 경성을 찾아왔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주고 싶었던 것이며, 또 그의 생활근황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민이 찾아오기 이전 장녀 나미가 태어났기에 이런 소식을 접하고 축하를 겸한 나들이기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튼 효석은 여기 경성농업학교에서 3년간(1931 ~1934초까지)을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경제적 궁핍을 무던히 겪으면서도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이 때에 쏟아져 나온 작품량은 일생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분량쯤 되었다 하고 질도 순수했음이라 한다. 이 당시 문학의 분류는 정리가 미비하였는데, 소설 그것도 단편소설의 범주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으니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였다. 그 때가 1936년, 그가 30세가 되던 해이다. 그는 이곳에 가서도 창작의욕을 잃지 않았다. 창작, 수필, 서간논평, 번역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다루고 작품 게재지 또한 다양하게 취급되었다. 등단의 위세로서가 아니라 중견작가로서의 발돋움을 해 가는 그이 이름은 경향을 막론하고 명성을 날려갔고 따라서 문명을 드날리는 이름만큼이나 그의 작품은 깔끔하게 그리고 다량으로 각 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병적으로 침식을 딪고 작품활동을 하였기에 가족 들은 상당히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35년 차녀 유미가 출생하였다. 그의 직계는 본인을 합하여 4명이 되었기 단란한 가족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자기 시간에 치중하여 작품에 몰두하였다. 유미가 출생한 다음해인 1936년에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다시 1937년에 장남 우현이 출생하여 가족은 5명이 되었고, 생활에 대한 빈곤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과 시간을 나누고 자녀들과 같이 놀기도 하 였다지만 작품에 대한 의욕은 변함이 없어 가족과는 잠깐씩이었고 게속 작품 쓰기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여간 경성농업학교 및 숭실전문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쓰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만큼 왕성한 면을 보였던 것이다.
병과 사(病, 死)
1941년 35세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계속하여 큰 수술을 받는 곤욕을 치루었다. 그 와중에도 작품은 계속 발표되었으나 병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1년후인 1942년 36세가 되는 5월에 다시 눕게 되었고, 5월 6일에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였고, 5월 10일에는 치유될 수 없는 형편에서 퇴원하여 귀가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수상태 무의식의 나날과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25일 하오에 별세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엄친에 의하여 당시 부모가 사시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고등골 산가에 안장하게 되었으나 그후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 하였다.
1998년9월9일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묘지공원으로 이장됨
- 생활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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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외모와 온화한 성격
이효석은 키가 별로 크지 않고 체격도 호리호리한 편으로 신장에 비해 얼굴은 길고 귀는 조금 큰 대신에 눈은 그리 크지 않은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항상 서구적인 깔끔한 옷차림으로 생활했다. 이효석은 자신의 성격이 다면적이라 생각했으나 항상 온화한 말로 사람을 대했으며 의지가 굳고 개성이 강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다재다능했던 사람
이효석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하였으며 고교 재학 시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수상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에는 영문학 성적이 우수했다. 그 외에도 그는 문학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음악적 능력도 탁월하였고 스포츠에도 재능과 소질을 보였다.
시대와 무관했던 탐미주의자
이효석은 시대적 좌절 속에서 당시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지도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서구적 취향에 맞는 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시대적 고뇌를 자신의 실존과 결부 지어 받아들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취향대로 대상을 즐기면서 시대에 반응한 존재였다.
서구지향적 모더니스트
ㆍ서구적 향기에 젖은 사람
그는 빵과 버터 등의 음식,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 프랑스 영화감상을 즐겼고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하며 유럽여행을 꿈꾸는 등 매우 서구적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서구적 취향은 신학문을 배우고 서양문화에 일찍 눈을 뜬 아버지의 영향, 고교와 대학시절 동안 읽은 서양 소설들, 대학에서 전공한 영어영문학, 외국인 교수와 만남, 주을온천 일대에서 직접 체험한 백계 러시아인의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ㆍ이상향을 찾아 헤맨 보헤미안
이효석은 실향 의식을 지닌 채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이상향을 찾아 헤맨, 일종의 보헤미안 내지 코스모폴리탄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했다.섬세한 감각의 예술가
ㆍ강력한 대타의식의 소유자
이효석은 섬세하고도 유약한, 섬세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이 의식은 주변에 대한 예민한 대타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복장을 잘차려 입고 다녔고, 총독부에 취직한 후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못 견뎌 괴로워하기도 했다.ㆍ섬세한 심리묘사와 정경묘사에 뛰어난 문학가
이효석은 사람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정확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해석력이 뛰어나 자연 정경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ㆍ문학과 예술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이효석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날의 생활과 예술이라고 하였고 인간 중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였으며,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전부인 작가였다.
- 삶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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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와 교육자
문학가 이효석
이효석은 주로 소설을 써서 발표했지만 습작기에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유명 작가로 알려지면서 그는 상당히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으며, 문학가라는 자신의 직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교육자 이효석
그는 경성농업학교 교사(1931 - 1934), 숭실전문학교 교수(1936 - 1938),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1938 - 1942)로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교직에 있으면서 그는 영어영문학을 가르쳤으며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맨스필드의 시를 낭송해주는가 하면, 입센, 토마스 만, 콕도의 작품을 해설해주기도 하며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생활의 향기
음식
이효석은 주로 서양음식을 좋아하였다. '제대로 된 버터'를 얻어 지하실에 저장하기도 하고, 우유를 배달시켜 매일 아침 먹기도 했다. 야외에 나갈 때는 '밀감으로 만든 잼'과 '야채 수우프'를 준비하여 식사를 했다.커피
이효석은 커피에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즐겼다. 그는 특히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 같은 질 높은 커피를 좋아해 가끔 서울에서 모카 커피를 구해 퍼콜레이터로 끓여 마시는 기회를 가지며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집차림
이효석의 평양 '푸른집'은 넓은 정원 속에 숨어 있는 붉은 벽돌집으로 목욕탕과 지하실, 피아노가 놓인 거실, 침대가 놓인 침실 등이 있는 마치 '산장' 같은 집이었다. 서가에는 항상 꽃이 꽂혀 있었고, 거실에 피아노와 축음기가 있었으며 쇼팽의 초상화와 여배우 사진이 벽에 걸려 있기도 했다.음악
이효석은 음악을 들을 때 삶의 기쁨을 통절히 느낄 정도로 서양의 고전음악 애호가였다. 그는 '야마하' 피아노를 집 거실에 두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어로 유창하게 부르기도 했다. 그는 집안에 축음기를 준비하여 항상 음악을 즐겼다.화초가꾸기
이효석은 정원에 꽃들을 키우며 '사람이 사람답자면 당연히 꽃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주 꽃집에 들러 꽃을 사기도 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꽃은 장미이며 카카리아, 글라디올러스, 촉규화, 맨드라미 등을 좋아했다.영화 이효석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기도 하였고 한 달에 7,8회나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를 즐겼다. 그는 프랑스 영화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그가 인상 깊게 본 영화는 <가을의 여성>, <안나카레리나>, <악성 베토벤>, <망향> 등으로 예술성을 중시한 영화들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다. 여행 이효석은 여행을 새로운 체험으로 생활의 폭을 넓히는 기회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국내 여행지로 금강산과 관동팔경, 주을 온천 등 주로 관북지방과 동해안을 선호했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을 여행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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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서울-평창을 오간 유아기와 유년기
이효석은 봉평과 서울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평창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하거나 풀밭과 거리에서 놀았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山果), 꿀 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경험은 고향과 자연을 그린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서울에서 보낸 청소년기와 청년기
이효석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졸업 후 결혼 초기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고교 시절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며 기숙사에서 체홉과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과, 토마스 만, 캐서린 맨스필드 등의 심미주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대학을 다닐 때 이효석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학교에 자주 출석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그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서울 수송동에서 초라한 하숙생활을 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으나 문인, 연극인, 영화인과 어울려 다니면서 화려하게 보이는 생활을 했다. 부인 이경원을 만나 결혼하게 되어 수송동에 신혼방을 마련하였다.
경성에서 보낸 한 시절 - 바다를 좋아하며 이국풍에 젖어 살다.
이효석은 1932년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ㆍ바다와 만나다.
이효석은 가까운 바다, 특히 독진 해변을 자주 찾으면서 바다와 결혼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다에 매료되어 해변을 걷기도 하고 해수욕을 즐기며 가보지 못한 먼 이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그는 도시생활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연의 모습을 만나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ㆍ이국풍에 젖기 시작하다.
이효석은 경성에서 당시 러시아와 가까운 국경도시였던 나남과 백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던 주을온천을 찾으며 이국풍의 풍경을 많이 접했고, 나남의 찻집 '동'을 찾아 서양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며 서구의 분위기에 젖기 시작했다.평양정착기 - 안정된 삶과 짧은 생애의 끝
ㆍ안정된 삶의 시작
이효석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리 일명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두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생활, 작가로서 유명한 생활을 이어 나가며 『모밀꽃 필 무렵』과 같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활발한 사회생활과 함께 주을 온천과 동해안 등 관북지방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했다.ㆍ고통스런 생애의 마지막
그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해 1940년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그는 1942년 5월 3일 고열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5월 7일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한 후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10일이 지나자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5월 22일 의사로부터 단념적 선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5월 25일 아침 7시 30분 짧은 삶을 마감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 그의 아버지는 시신을 화장, 운구하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매장하였다. 그 후 묘는 1973년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지가 훼손될 위험이 있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 변으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1998년 9월 경기도 파주시 경모동화공원으로 옮겨졌다.세상 떠난 후에
이효석이 세상을 뜬 후 세 차례(1959년 춘조사, 1971년 성음사, 1983년 창미사)에 걸쳐 전집이 발간되었으며 수백여종에 달하는 작품집이 발간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성이 뛰어나 1948년 이후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모밀꽃 필 무렵", "산", "들", "돈(豚)" 등의 소설과 "낙엽을 태우면서", "화초", "청포도 사상" 등의 수필이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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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이효석생가터(生家垈)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동 681번지
구조 : 목조8칸 함석집메밀꽃 필 무렵 기념비(紀念碑)
봉평 입구에 봉평경여자 협의회에 의하여 세워짐
가산공원(公園)
마을 종교부지였던 것을 평창군과 가산문학선양회의 노력으로 공원화되었고 공원에는 이효석동상이 건립되었다.
물레방아간과 문학비(文學碑)
문학비 전면에는 메밀꽃 필 무렵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물레방아간은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배경지로 92년 문화부에 의하여 복원됨.
-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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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주요 이력 및 작품 1907년 1907년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출생. 이시후와 강경홍의 1남 3녀 중 장남, 아호는 가산, 필명으로 아세아(亞細亞), 효석(曉晳) 등을 쓰기도 함 1910년(4세)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 1912년(6세) 봉평으로 내려와 서당을 다님 1914년(8세) 평창공립보통학교 입학 1920년(14세)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25년(19세)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우등으로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꽁트 『여인(旅人)』 등을 발표하기 시작함 1926년(20세) 꽁트『달의 파란 웃음』등 발표 시 『겨울시장』, 『야시(夜市)』등 발표 1927년(21세) 대학 예과 수료 후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 진학. 시 『6월의 아침』, 『님이여 어디로』등 발표 단편 『주리면… - 어떤 생활의 단편』발표 번역소설 『밀항자(密航者)』발표 1928년(22세) 단편 『도시(都市)와 유령(幽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929년(23세) 단편 『기우(奇遇)』, 『행진곡(行進曲)』 등 발표. 시나리오 『화륜(火輪)』발표. 1930년(24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졸업논문『The plays of J. M. Synge』). 단편 『깨뜨려진 홍등(紅燈)』, 『마작철학(麻雀哲學)』, 『약령기(弱齡記)』등 발표. 1931년(25세)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신 이경원(李敬媛)과 결혼. 일본인 은사인 쿠사부까 조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취직하나 이내 그만 둠. 단편『노령근해(露領近海)』『프레류드』등 발표. 시나리오『출범시대』발표 첫 창작집 『노령근해(露領近海)』발간 (동지사<同志社> 1931년) 1932년 (26세) 함경북도 경성(鏡城)으로 이주 경성농업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직. 장녀 나미(奈美) 출생 단편『북국점경(北國點景)』,『오리온과 능금』등 발표 1933년 (27세) 김기림(金起林), 이종명(李鍾鳴), 김유영(金幽影), 유치진(柳致眞), 조용만(趙容萬),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이무영(李無影) 등과 구인회 결성. 단편『돈(豚)』발표 미완성 장편 『주리야』연재 산문 『단상(斷想)의 가을』『"리-알"·꿈』등 발표 1934년 (28세) 단편『일기(日記)』,『마음의 의장(意匠)』과 산문『낭만·리얼 중간의 길』등 발표 1935년 (29세) 차녀 유미(溜美) 출생. 단편『계절(季節)』, 중편『성화(聖畵)』, 산문 『卽實主義의 길로 - 民族文學이냐 階級文學이냐』 등 발표 1936년 (30세) 숭실전문학교 교수 취임. 평양 창전리 48번지로 이사. 단편『인간산문』,『모밀꽃 필 무렵』등 발표. 1937년 (31세) 장남 우현(寓鉉) 출생. 단편『삽화』, 『개살구』, 『거리의 목가』 등 발표. 1938년 (32세) 숭실전문학교 폐교에 따라 교수직 퇴임. 단편『장미 병들다』, 『부록』 등 발표 1939년 (33세) 차남 영주 출생.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취임. 단편『산정』, 『향수』등 발표. 희곡『역사(歷史)』, 산문 『문운융성(文運融盛)의 변(辨)』 등 발표 단편집『해바라기』(학예사(學藝社)), 작품집 『성화』(삼문사), 장편『화분』(인문사) 발간. 1940년 (34세) 부인 이경원과 사별. 장편 『창공(蒼空)』연재, 단편『은은한 빛』,『하르빈(哈爾濱)』 등 발표 1941년 (35세) 단편 『라오코윈의 후예(後裔)』, 『엉겅퀴의 章』 등 발표 단편집 『이효석 단편선』(박문서관), 장편『벽공무한』(박문서관) 출간 1942년 (36세) 결핵성 뇌막염으로 5월 25일 별세. 평창군 진부면 논골에 안장 단편 『일요일』,『풀잎, 산문『문학과 국민성』등 발표 1943년 작품집 『황제』(박문서관) 발간 1960년 춘조사에서 『효석전집』(전 5권) 발간 1973년 문화의 날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소가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됨 1983년 창미사에서 『이효석전집』(전8권) 발간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묘소가 파주로 이장됨 2002년 《이효석문학관》개관